가리장, 그리움을 채우다.

Section 4.

어디까지 먹어봤니


가리장,
그리움을 채우다.

들녘의 애환을 달래는
소울 푸드

보랏빛 꽃송이, 짙은 방아 향기를 좋아하세요?

무엇을 삼켜야 저런 빛깔과 향을 가질 수 있을까? 들녘을 거닐 때면 금세 스치기만 해도 진하고 알싸한 향기를 내뿜는 방아(배초향), 고고한 자태로 꽃대를 올리며 생의 에너지를 내뿜는다. 천경자(금산면 거주, 50)씨는 흐드러지게 핀 방아꽃을 볼 때면 어김없이 “가리장”에 얽힌 추억이 떠오른다.

“가리장은 싱싱한 고둥 맛이 관건이거든요. 갓 잡아 온 고둥을 국 끓여 먹었죠. 원래는 흙을 머금고 있어 따로 해감을 해야 하는데, 배는 고프고, 기다릴 시간이 없잖아요. 그러면 엄마는 꾀를 내서 고둥 끝을 돌로 깨뜨렸어요. 내장을 떼어 내고. 즉석에서 끓여 먹는 거예요.”

귀한 손님이 오는 날, 가족들의 특별 보양식도 “가리장”이었다. 평소에는 온 식구가 힘을 합쳐야만 겨우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옹기종기 작은방에 모여 식구들은 저마다 바늘로 김이 오르는 삶은 고둥 알을 뺏고, 그 사이 엄마는 담장 밑 방아잎을 훑어다 걸쭉한 고둥 가리장을 밥상에 올리셨다. 거친 보리밥 먹던 시절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렵인 터라. 단연코 흰쌀밥이 밥상의 주인공이었다면, 이 날 만큼은 가리장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주고 만다.

가리장은 국도 아니고 찌개도 아닌 거죠, 밀가리(밀가루)가 물에 확 퍼지면서 양이 넉넉해지거든요. 그러면 식구들이 배불리 먹었어요. 숟가락으로 냄비 바닥을 싹싹 긁어먹을 만큼 간이 짭조름하면서 개미가 있어, 계속 손이 갔죠. 그러면 어머니는 말씀하셨죠 “아이고, 고마 솥째 다 무삐라.” 그 소리에 한바탕 또 웃는 거죠.

가리장, 들녘의 애환을 달래다.

집현면에서 나고 자란 그는 모내기철이 다가오면 부모님을 따라 논으로 나섰다. 아버지는 볍씨 싹을 틔워 모판을 만들고 논에 물을 댄다. 손으로 모를 심던 시절, 동네 사람들은 함께 어울려 모를 심었고, 동네 아이들은 산으로 들로 쏘다녔다. 산에 올라 찔레 순을 꺾기도 하고, 도랑가 고둥을 잡기도 한다. 빙글 뱅글 춤추듯 돌아가는 고둥은 흙바닥에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린다. 아이들은 유심히 지켜보다 그중 한 놈을 손에 잡아든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해가 기울면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땀범벅이 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일을 마친 아낙들도 허리를 숙여 논 고 잡는 풍경이 펼쳐지면 입에서는 절로 ‘아이고 디다’ 탄식이 터진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 한줄기에 땀이 식는다. 눈을 들어 들을 천천히 살피면 따로 장을 보지 않아도 걱정이 없다. 사시사철 자연이 내어주는 만큼만 거두어 밥상을 차린다.

엄마가 남기고 간 유산이자 소울 푸드

지금처럼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먼저 냉장고를 장만한 집에서 얼음을 얼려 이웃에게 나눠주곤 했었죠. 무더운 여름을 이웃들의 정으로 달래며, 무사히 보낸 것 같아요.

지난해 엄마를 여읜 그는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가리장을 만들었다. “저한테 가리장은 ‘소울 푸드’ 예요. 한 숟갈 먹고 나면 마음이 포근해지고, 평온해지고 그런 음식, 재료가 달라 예전 그 맛은 안 나지만 그래도 언제나 나를 토닥여 주는 부드러운 이 감각이 좋아요. 정말 다행이죠. 엄마에게 직접 배운 적은 없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가리장을 엄마가 끓여 준 그 옛날 추억의 맛 비슷하게라도 만들 수 있는 걸 보면……”

“아마 엄마도 가리장 하는 걸, 엄마의 엄마한테서 배웠겠죠.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의 온기를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그 시절 오래전 엄마의 애쓴 사랑이 느껴져요. 돌아가신 그날부터 단 한순간도 엄마를 잊은 적이 없어요. 꿈이라도 좋으니, 오래전 엄마가 나에게 차려준 가리장 밥상을 이번에는 내가 엄마에게 올리고 싶은데……”말끝을 흐리며 눈시울이 뜨거워진 그는 고향에서 가져온 노란 호박꽃과 방아꽃으로 단장한 가리장 밥상을 차렸다.

“헛헛하고 외로울 때 방아향 가득한 가리장 만들어 보세요. 갓 지은 쌀밥과 걸쭉한 가리장 한 대접 먹고 나면, 저만치 밀어둔 삶의 온기가 가득 찰 테니까요.”


가리장은 우렁이 대신 다슬기나 참게 등을 재료로 쓰기도 한다. 밀가루 대신 찹쌀가루, 멥쌀가루를 이용하기도 하고, 고추장으로 간을 하기도 한다. ‘가리장’은 ‘가루장’을 경상도식으로 발음한 것으로 ‘가리장’은 ‘가루(粉)’와 ‘장(醬)’의 합성어로 보인다. 가리장만 가지고도 영양보충이 되어 식사대용이 될 수 있는 음식이다.

가리장국 (가루장국)

논고둥(우렁이) 200g
밀가루 100g
방아잎 한움큼
고추 2~3개

물 800ml
들깨가루 1큰술
국간장 1큰술
다진마늘 1큰술